<역행기>는 국립극단이 2024년 재개한 창작희곡공모를 통해 발굴된 첫 대상 수상작으로, 창작극 개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총 303편의 응모작 가운데 선정된 <역행기>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이야기가 요구하는 상상적 공간의 스케일과 이야기를 추동하는 주제의 다층성을 고려할 때 대작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자료 조사와 낭독공연 등 작품 개발 과정을 이어왔으며, 약 2년간의 작업 끝에 비로소 관객과 만난다.
첫 대상의 영예를 안은 작가 김주희는 “어두운 방 안에서 내 인생은 왜 이런가 하며 헛웃음이 나던 순간에 받은 선물 같은 상이었다”라며 “희망을 품고 치열하게 작업하는 수많은 동료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어 “가시화되지 않았던 우리 주변 평범한 이들의 삶이 얼마나 눈부시게 가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관객들에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다정한 노크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하며 관객과의 첫 만남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작품이 친숙한 그리스·로마 신화가 아닌 다소 낯선 수메르 신화를 배경으로 택한 것은 길가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작은 풀 한 포기의 생명력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땅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호기심 끝에 인류 최초의 문자로 기록된 수메르 신화 속 ‘인안나 여신의 명계 하강’ 이야기를 마주했다. 지상과 저승의 권력을 모두 욕망하며 일곱 관문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내려간 여신의 신화를 은유 삼아 우리가 딛고 선 땅 밑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펼쳐낸다. 이번 공연은 단순한 신화적 판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일상을 버텨내는 평범한 이들의 삶이 지닌 가치에 관객들이 함께 공감하고 감응하도록 이끈다.
원전인 ‘인안나의 명계 하강’은 고대 수메르의 대표적인 신화로, 풍요와 사랑의 여신 인안나가 이복언니 에레쉬키갈이 다스리는 지하 세계(명계)를 방문하는 여정을 그린다. 명계의 엄격한 법칙에 따라 일곱 관문에서 모든 소유물을 박탈당하고 나체로 죽음을 맞이한 인안나가 신들의 도움으로 부활해 지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신화는 거대한 상실의 경험 속에서도 끝내 부활을 선택하며 삶과 계절의 순환을 만들어내는 인간 정신의 원형을 상징한다.
<역행기>는 신화적 모티프를 바탕으로, '상실'에서 비롯된 인물들의 서사가 극 전반을 관통한다. 가족이기에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가족이기에 끝내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은 인물 간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개인의 상실과 고독, 관계의 균열을 좇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끝내 삶을 이어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비춘다.
이러한 서사는 한국 현대사의 그늘에 묻혀 있던 여성들의 삶으로 구체화된다. 가부장적 폭력과 노동 현장의 상처를 견뎌낸 3대(代) 여성들의 역사는 세대를 이어 전해진 기억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며, 지워진 과거로 역행해 끊어진 삶을 다시 잇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신화를 바탕으로 한 거대한 서사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상처와 회복을 담아내 시대와 공간을 넘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관객은 공연 전반에 은은하게 스며든 공허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각자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신재훈 연출은 이를 다채로운 무대적 요소와 배우들의 내밀한 호흡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내며,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 높은 무대로 완성할 예정이다.
신재훈 연출은 “낙오와 고립은 개인의 탓이 아닌 사회 시스템이 남긴 깊은 상흔”이라며, “방바닥에 들러붙는 고통을 겪는 이 시대의 모든 청년이 이 작품을 통해 아픔을 공유하고, 어둡고 축축한 바닥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장 단단한 기반임을 느끼며 위로와 희망을 얻길 바란다”고 전했다.
연극 <역행기>의 모티프가 된 수메르 신화와 고대 근동 문명의 세계관을 깊이 탐구할 수 있는 연계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공연 기간과는 다소 시차가 있지만, 오는 11월 10일 명동예술극장에서는 구약학과 고대근동언어 박사로서 유튜브, EBS 등 다수의 방송 매체에서 강론을 펼치고 있는 주원준 박사의 강연으로 <명동人문학> '길가메쉬와 이쉬타르의 여행-고대근동 신화가 들려주는 성장과 구원의 여정' 회차가 진행된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를 바탕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정신세계를 조명하는 이번 강연은 고대 근동 신화가 예술에 남긴 영향을 연극 <역행기>와 직접 연계해 다루며, 관객들이 무대 위 인안나와 에레쉬키갈의 신화적 은유를 한층 폭넓게 사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