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작품은 한국의 전통 종이인 한지, 먹, 그리고 불같은 가장 기본 재료를 통해 완성되며, 모든 작업이 반복과 절제를 통해 명상적으로 이루어진다. 한지 위에 겹겹이 쌓이는 먹과 불꽃의 흔적은 작가에게 무한한 예술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재료이며, 자연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독창적이고 시적인 선이다. 재료를 일방적으로 사용하기보다 재료를 마주하며 극도의 통제와 우연적 과정의 공존에 귀 기울이는 과정은 관람자에게 정서적 치유와 명상의 의식을 환기한다.
전시 제목 <One after the Other>는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생성되는 연결성과 통일성,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이중성과 명상적 흐름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성찰을 내포한다. 고요하고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축적되며, 삶이 마치 '하나' 다음에 또 '하나'의 순간들로 구성된 것처럼, 결국 '연결'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단절과 연속, 파괴와 생성, 개별과 전체라는 상반된 개념이 공존하는 지점을 탐구한다.
갤러리현대 1층 전시장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신작 〈Zip〉 시리즈를 선보인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요소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Zip〉 시리즈는 불태우기, 반복되는 중첩, 그리고 종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통해 이중성과 통일성, 그리고 변형에 대한 그녀의 탐구를 계속 이어 나간다. 은은한 색감으로 염색한 한지를 길게 잘라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그 조각들을 층층이 겹쳐 지그재그 패턴으로 엮는다. 이러한 지그재그 패턴은 일종의 리듬감 있는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음새이자 꿰매어진 균열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의 조각은 고유한 존재이지만,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전체적인 의미를 완성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연결을 넘어 시간의 흐름과 관계의 형성, 그리고 이것이 겹겹이 쌓이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지하 1층에는 작가의 대표 연작 〈Mountain〉을 선보인다. 〈Mountain〉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의 파도 소리를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에서 출발한 연작이다. 바다의 파도가 절벽에 힘 있게 부딪히면서 쌓여가는 소리가 겹겹이 얹히는 먹의 레이어로 표현되고,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연스럽게 고향 광주의 산을 기억하며, 작가 내면에 자리한 '산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재현이 아닌, 어린 시절 기억 속 자리 잡은 '산의 본질'에 가까운 이미지로, 한 폭의 시로 시각화된 광활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산과 바다가 대지라는 만물의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토대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해 봤을 때, 바다를 표현한 것이 산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작가 작업 세계의 주요한 '명상, 순환, 통일성'과도 자연스레 연결되며 보는 이를 심연 깊숙한 세계로 안내한다. 〈Traces〉는 2024년 아트바젤 언리미티드 섹터 출품 이후 처음 공개되는 작품으로, 작가의 작업 중 가장 대규모로 제작된 설치 작업이다. 길이 8미터에 달하는 〈Mountain〉을 중심으로, 양측 벽에는 〈Mountain〉을 얇게 자른 뒤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이를 섬세하게 배열해 완성한 〈Timeless〉 두 점이 설치된다. 〈Timeless〉는 제목 그대로 '시간을 초월한(timeless)' 존재, 바닷물결의 소리를 형상화한 작업이다. 작가는 두 연작의 물질적, 형식적 연계를 통해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반복적인 작업을 거쳐 추상적 지평선을 구축한다. 이는 시작과 끝의 경계를 지우는 순환의 개념을 보여주며,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반영한다.
2층 전시장에서는 '연결'과 '공존'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투명하고 중첩된 한지 조각들이 독립된 개체이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서 형태로 드러내는 〈Encounter〉, 작고 연약한 존재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가느다란 잉크 선으로 연결하거나 뻗어나가게 한 〈Predestination〉, 먹과 수채 물감이 서로 밀어내는 효과를 이용해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터지는 찬란한 순간을 연상시키는 〈Firework〉와 같은 작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 간의 연결과 시공간 속 찰나의 의미를 사유하도록 한다. 김성우 기자